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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지나간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과 무거운 침묵만이 흐른다.
불타오르는 유전에서 발생한 연기는 양떼들도 양치기도 검게 그슬렸다. 불타는 유전의 연기로 대낮에도 어두운 스산한 풍경이다. 2016년 12월 가야라, 이라크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의 모습. ISIS 점령 이후 2년간 이슬람 급진주의자의 강압 통치와 각종 전투에 시달리며 많은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대규모 난민캠프을 집중 운영하는 터키나 요르단과는 달리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촌은 소규모로 곳곳에 흩어져 있다. 레바논 정부는 레바논에 거주하는 시리아 난민 수를 약 150만명으로 추정한다. 국가 전체 인구가 총 680만명 인것을 감안할 때 이는 적은 규모가 아니다. 2016년 2월 안자르, 레바논
이라크 가야라 근처. 1950년대 만들어진 낙후된 정제소는 지속되는 전쟁으로 보수 유지가 불가능해 문을 닫은 지 오래다. ISIS가 퇴각 도중 불지른 유전의 연기에 휩싸여 마치 지옥의 묵시록을 보는 듯 하다. 2016년 12월 가야라, 이라크
뒤쳐진 자들을 몰아치듯, 생사의 갈림길이 선명하게 펼쳐진다.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던 ISIS로부터의 영토 재탈환 과정은 모술 시내로 들어서자 더디게 느려졌다. 퇴각 도중 곳곳에 장애물과 급조폭발물 그리고 시민들을 인간방패로 삼는 ISIS의 전술 때문이었다.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ISIS로부터 풀려난 직후 원망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이라크 여인.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ISIS에 매복을 당한 직후 급히 후퇴하는 쿠르드 민병대. 2016년 12월 바시카, 이라크
이라크 군과 교전 후 패퇴한 ISIS로부터 풀려난 모술 시민들. 최전방에서 안전 지대로 분주히 이동 중이다.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작가가 합류한 쿠르드계 민병대가 ISIS에 갑자기 매복을 당했다. 당시 숨을 곳이라곤 장갑차와 트럭 사이밖에 없던 찰나 급작스레 달려온 아달란 지휘관은 반격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내게 몇 발자국 옮겨달라고 요청한 뒤 수 초 후 머리에 총을 맞았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당시 교전에서 그의 부하 아와라는 전사했다. 2016년 10월 바시카, 이라크
ISIS는 이라크 정부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일반 시민들을 인간 방패로 삼았고, 퇴각 도중 일부를 포로로 삼아 데리고 갔다. 생이별한 가족들을 찾는 아비규환의 혼란이 이어졌다.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ISIS에 대항해 싸우던 쿠르드계 민병대의 젊은 군인. 갑작스런 매복의 공격을 가까스로 벗어난 후. 2016년 10월 바시카, 이라크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더디고 고통스럽게 흐른다.
ISIS와의 치열한 교전 중에 부상 당한 어린 소녀가 안전지대로 빠져나오고 있다.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ISIS의 공포정치에서 탈출한 티그리스 출신 이라크인 모자. 무인지대를 거쳐 10km여를 걸어오는 도중 어린 아들이 지뢰를 밟았지만 속수무책으로 부상 당한 아이를 안고 계속 걸어야만 했다. 쿠르드군 참호에 도착하여 도움을 청하고 있다. 2016년 5월 하위자, 이라크
2017년 4월 모술, 이라크
모술에서 부상 당한 어린 아이가 50여km 떨어진 에르빌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다. 2016년 12월 에르빌, 이라크
시리아 홈스 출신의 난민. 2016년 2월 트리폴리, 레바논
미지의 세계를 향한 험난한 발걸음에는 설레임이 담겨있다.
레스보스섬에 도착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시리아의 내전이 조금 더 근래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시리아 출신 난민들이 더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탈레반의 통치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개입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하는 난민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15년 11월 레스보스,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도착한 한 시리아 여성이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다. 찟어진 고무보트와 이리저리 흩어진 구명 조끼들, 난민들이 남기고 간 온갖 잡동 사니의 틈바구니에서, 마치 평온한 일상처럼 육아를 수행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초연하기까지 하다. 자식에게 전쟁의 위험이 없는 보다 나은 환경을 선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어머니도 이 불안한 여정길에 나섰을 것이다. 2015년 9월 레스보스, 그리스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이제 막 바다를 건너온 시리아 난민 아동을 체코에서 온 한 자원봉사자가 꼭 안아주고 있다. 이 역사적인 난민의 이동은 역설적으로 인류애를 확인하는 장이기도 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먼길을 달려와, 난민들이 도착하는 해안가나 이들이 지나가는 국경지대에서 이들에게 따뜻한 차 한잔, 이불,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환영한다는 한 마디를 건네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당신들이 홀로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려는듯. 2015년 11월 레스보스, 그리스
막 건너온 바다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리아 난민 가족. 그들을 맞아 주는 건 그들 이전에 도착한 이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 뿐. 이후 이 해안가는 도움의 손길을 주고자 하는 NGO와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2015년 9월 레스보스, 그리스
사람들은 주변 상황에 지쳐, 빠르게 동요하고 불안해한다.
턱없이 부족한 행정 인력으로 그리스 본국으로 이동할 수 있는 허가서 발급은 더디기만 하였다. 난민들은 조바심에 새치기를 하거나 타국 출신의 난민들을 비난하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마치 이들 때문에 자신의 여정이 지체된다는 듯이. 2015년 9월 레스보스, 그리스
유럽의 첫 관문, 그리스에 도착해도 여전히 상황은 불확실하고 혼돈의 연속이었다. 하루에 천 명 이상 도착하는 난민을 수용하기에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리스 정부는 이들의 본토 이동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까 결정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 사이 레스보스 섬의 난민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섬을 떠날 수 있는 허가서는 쉽사리 발급되지 않았다. 불확실성과 혼돈으로 이들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2015년 9월 레스보스, 그리스
원치 않는 여정에 나선 모든 이들에게 미래는 불안한 것이지만, 영문도 모른채 생사의 위협을 받게 된 아이들의 눈빛에서는 당혹감과 두려움이 더욱 선명했다. 아이들 앞에서 부모들은 불안한 감정을 애써 감추어야 만 했다. 2015년 9월 북마케도니아 국경
가족에 대한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묵묵하게 한걸음씩 걸어간다.
서로에게 의지해 잠을 청하고 있던 난민 커플. 넘쳐나던 난민들과 부족한 수용시설로 레스보스 섬은 도심 내 공원 등에서 텐트를 치거나 누울 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허가증 발급까지 대기하는 동안의 임시 거처가 되었다. 2015년 9월 레스보스,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국경 지역. 유럽연합 국가 내 목적지 도달을 위해 난민들은 발칸 국가들을 경유하게 된다. 국경 지대 일정 지점을 건너가는 도중, 난민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지나가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5년 9월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국경 지대에서 대기하고 있는 난민들이 겪게 되는 지옥같은 상황. 밤새 국경지대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던 그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태우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플라스틱병을 태우는 것이 유독한 연기를 내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2015년 11월 슬로베니아 국경
조부에서 손자까지 3대 모두 피난의 여정에 오른 아프가니스탄 가족. 비용 때문에 또는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사고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일부만이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대가족 전체가 그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는 경우도 있다. 2015년 9월 레스보스
어려운 길을 함께 걷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두려움을 이기며, 단단해진다.
궂은 날씨에도 멈출 수 없었던 행군의 기억으로 비가 내리면 지금도 서글퍼진다. 2015년 9월 북마케도니아-세르비아 국경
비교적 조용한 인근의 공식 국경 통제소와는 달리 임시 통제소는 난민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장소로 버스나 기차로 이동하는 난민들로 밤낮없이 분주하고 북적대었다. 2015년 10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탈출에 성공한 난민들은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긴 호흡으로 살아간다.
긴 물길을 건너기에 로힝야 난민들이 의탁하는 보트는 너무나 부실하다. 비어있는 컨테이너의 부력으로, 정원을 훨씬 초과하는 인원의 목숨을 건 여정. 마침내 도착한 방글라데시 해안가에서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2017년 11월 다킨파라,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의 쿠투팔롱 난민캠프는 약 86만명을 수용하는 최대규모의 난민캠프이다. 한 때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 쌓여있던 지역이었으나 정착한 난민들의 거주지 건설 재료와 땔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18년 7월 쿠투팔롱캠프, 방글라데시
NGO 단체가 보급하는 생필품을 받기 위해 난민들이 줄을 섰다. 1980년대 초 미얀마 군부 정권의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건너온 수천명의 로힝야 난민들이 정착해있다. 2018년 7월 쿠투팔롱캠프, 방글라데시
생명의 경이로움은 이곳에서도 계속된다. 새로운 희생자의 탄생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은총과 기적을 꿈꾼다. 2017년 11월 쿠투팔롱캠프, 방글라데시
난민들의 생존을 위해 지속적인 물 공급은 필수이다. 대부분 지하수 관정을 통해 용수를 공급한다. 풍족한 물은 이 지역에 유일하게 허락된 자연의 선물이다. 2017년 11월 쿠투팔롱캠프,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 곳곳에는 난민 아동들을 위한 학교가 있다. 많은 아이들이 캠프에서 나고 자라 성인이 되어서도 캠프가 있는 국경 근방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이들은 교육을 통해 상황을 벗어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2017년 11월 쿠투팔롱캠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난민을 홍수에 비유하고, 그들이 섞여 사는 곳을 정글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 길 위에서 만난 수단 난민 아담과 친구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들의 여정을
난민캠프에서 보내기로 하고 칼레로 향한다. 그곳의 난민들은 자선단체들로부터 기부받은 목재와
천막으로 집을 짓고 산다. 자선 단체의 기부품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정글은 가로등 몇개를
제외하고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해가 지면 금세 암흑 천지가 된다. 해가 긴 여름에는 ‘정글’
이곳 저곳에서 웃음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은 그마저도 멈추었다. 도버
해협의 관문인 칼레는 날씨가 변덕이 심하고 바람은 세차게 분다. 몇몇은 유로터널을 건너 영국에,
몇몇은 이 곳 프랑스에 정착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영국은 시리아 국경 부근의 유엔난민캠프에서 직접 시리아 난민들을 데려오려는 계획을 세웠고,
프랑스는 유로 터널로 몰려들 난민들에 대비해 항구 주변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이 겨울, 아프라카계
난민들은 국제 사회의 난민에 대한 관용이 자신들을 비껴갈까봐 우려가 깊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난민을 홍수에 비유하고, 그들이 섞여 사는 곳을 정글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 길 위에서 만난 수단 난민 아담과 친구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들의 여정을난민캠프에서 보내기로 하고 칼레로 향한다. 그곳의 난민들은 자선단체들로부터 기부받은 목재와천막으로 집을 짓고 산다. 자선 단체의 기부품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정글은 가로등 몇개를제외하고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해가 지면 금세 암흑 천지가 된다. 해가 긴 여름에는 ‘정글’이곳 저곳에서 웃음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은 그마저도 멈추었다.
도버해협의 관문인 칼레는 날씨가 변덕이 심하고 바람은 세차게 분다. 몇몇은 유로터널을 건너 영국에,몇몇은 이 곳 프랑스에 정착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영국은 시리아 국경 부근의 유엔난민캠프에서 직접 시리아 난민들을 데려오려는 계획을 세웠고,프랑스는 유로 터널로 몰려들 난민들에 대비해 항구 주변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이 겨울, 아프라카계 난민들은 국제 사회의 난민에 대한 관용이 자신들을 비껴갈까봐 우려가 깊다.
그리스에 도착한 난민들은 발칸 반도의 나라들을 거쳐 서유럽의 관문인 독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가 세르비아를 거쳐 크로아티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로 가는 여정이지만 자국 살림이 녹록지 않은 이 나라들은 난민들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헝가리는 국경을 폐쇄하기까지 했다. 헝가리에 이어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로 통하는 국경을
폐쇄했다가 화물 물동량이 밀려 일시적으로 개방했다.
난민들은, 자국의 상황이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이 길을 택했지만, 그 여정은 너무도 길고
험하다. 크로아티아 밥스카에서 만난 한 시리아 난민은 터키에서 3일 동안 도보로 산을 넘은 후
보트를 타고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쉬지 않고 걸어 크로아티아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크로아티아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버티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오파토바츠에 있는
검문소 부근에는 3만여 명이 머물고 있어 더 이상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텐트도 없이 노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감기와 누적된 피로로 고통스럽지만, 검문소 안에 있는 의사를 만날 수가 없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감당할 수 없는 난민들을 헝가리 국경 근처로 끊임없이 이동 시키고 있고, 경찰은
그런 현장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유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넘어온 이들은 이 기나긴 여정에서 산재한 위험과 마주하고 있다.
아이들은 길 위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부모들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그들은 묻는다: “우리 다음 도착지가 어디에요?”
그리스에 도착한 난민들은 발칸 반도의 나라들을 거쳐 서유럽의 관문인 독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가 세르비아를 거쳐 크로아티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로 가는 여정이지만 자국 살림이 녹록지 않은 이 나라들은 난민들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헝가리는 국경을 폐쇄하기까지 했다. 헝가리에 이어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로 통하는 국경을 폐쇄했다가 화물 물동량이 밀려 일시적으로 개방했다.
난민들은, 자국의 상황이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이 길을 택했지만, 그 여정은 너무도 길고 험하다. 크로아티아 밥스카에서 만난 한 시리아 난민은 터키에서 3일 동안 도보로 산을 넘은 후 보트를 타고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쉬지 않고 걸어 크로아티아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크로아티아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버티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오파토바츠에 있는 검문소 부근에는 3만여 명이 머물고 있어 더 이상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텐트도 없이 노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감기와 누적된 피로로 고통스럽지만, 검문소 안에 있는 의사를 만날 수가 없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감당할 수 없는 난민들을 헝가리 국경 근처로 끊임없이 이동 시키고 있고, 경찰은 그런 현장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유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넘어온 이들은 이 기나긴 여정에서 산재한 위험과 마주하고 있다. 아이들은 길 위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부모들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그들은 묻는다: “우리 다음 도착지가 어디에요?”
이 작은 도시에 빠듯한 생활비로 생활하는 4명의 모하메드가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온 아부(Abou -
아랍어로 아저씨라는 단어. 남자 성인을 부르는 애칭 앞에 주로 쓰임) 샴(Sham, 24살 - 다마스쿠스의
또 다른 이름)과 아부 리다(Rida, 21살), 알레포(Aleppo 또는 Halep으로 불리는 시리아 북부 도시)
출신의 아부 할렙(Halep, 24살), 홈스(Homs 또는 Hamah로 불리는 시리아 서부 도시) 출신의 아부
하마(Hamah, 21살)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도시를 관통하기 전, 아부 샴은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으며 매니저로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었고 나머지 3인의 모하메드는 모두
대학 재학 중이었다. 내전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모하메드의 부모들은 더 안전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자식들을 이 난민 대열에 합류시켰다.그리고
그 루트의 한가운데인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나는 아부샴을 만났다. 그는
희망에 가득차 있었고 미래를 낙관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독일어를 배우면 금방 이 사회에 적응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15년 10월 그들은 독일에 도착했고, 독일 내에 위치한 난민 캠프에 잠시 머물다 마를로 오게
되었다. 마를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들은 3개월에 한번씩 갱신을 해야 하는 임시 체류증으로 그들의
신분증을 대신하며 산다. 임시 체류증으로는 일을 하지 못하며,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하는 독일어
수업은 주당 10€를 내야 한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이들의 삶은 나른해 보이며, 태만해
보인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에게 허용된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A4 한 장으로 복사된 임시 체류증이 이들의 삶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네오나치들이
난민들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와 이들을 더욱 움츠리도록 만든다.
독일 정부는 현재 미성년자가 있는 난민 가족부터 독일 여권을 지급하고 있다. 아부 하마의 친 누나는
남편과 6살난 조카와 함께 마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헤르네(Herne)에서 살고 있다. 아부 하마의
조카는 독일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그의 누나와 매형은 독일 여권을 받았다. 매형은 아직 독일어가
서툴어서 직장을 못 구하고 있다. 그래서 남는 시간 근처 난민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독일정부의 난민 정책으로 그들은 2인 1조로 방 2개와 거실 하나인 아파트를 배정받아 살고 있으며,
각 300€ 남짓한 생활비를 보조받는다. 집 하나당 약 150€ 정도의 관리비와 전기세 및 상/하수도세가
나가면 다른 EU국가 보다 물가가 저렴한 독일이어도 한 달 생활비는 빠듯한 편이다.
아부샴은 이야기한다. "난 독일에서 돈을 벌어서 레바논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꺼야. 우리 엄마
옆에는 아무도 없어. 난 물담배를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물담배를 좋아해. 그래서 같이
물담배하면서 사는게 꿈이야."
이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탈출했지만 이들은 고국을 버릴 수가 없다.
막혀버린 국경은 이들의 꿈을 막아섰고 강대국의 정치 논리에 청춘을 빼앗겼으며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고향에 대한 좋은 추억조차 상실해 버렸다. 게다가 편파적이고
선정적인 대중 매체의 보도로 인해 전세계 사람들이 이들을 모두 무슬림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있지는
않는가.
아부 하마는 이야기 한다.
“형과 누나들은 한달에 한번씩은 만나러 가. 뒤셀도르프와 헤르네 근처에 사는데 사실, 부모님이
걱정이야. 자식들이 사라져도 정부가 불이익을 주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곳이니까."
미국과 러시아 등의 개입으로 시리아 내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은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그 약속이 얼마나 갈 것 같아? 난 누구보다도 이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야. 시리아엔 아직 다이쉬와 알누스라가 있잖아. 난 정말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어. 전쟁이
끝나면 서둘러 시리아로 갈꺼야. 거기가 내 고향이고 내가 살 곳이야."
인터넷으로 평화로왔던 다마스쿠스의 사진을 보며 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나즈막하게 묻는다.
"그때가 언제일까?"
이 작은 도시에 빠듯한 생활비로 생활하는 4명의 모하메드가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온 아부(Abou - 아랍어로 아저씨라는 단어. 남자 성인을 부르는 애칭 앞에 주로 쓰임) 샴(Sham, 24살 - 다마스쿠스의 또 다른 이름)과 아부 리다(Rida, 21살), 알레포(Aleppo 또는 Halep으로 불리는 시리아 북부 도시) 출신의 아부 할렙(Halep, 24살), 홈스(Homs 또는 Hamah로 불리는 시리아 서부 도시) 출신의 아부 하마(Hamah, 21살)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도시를 관통하기 전, 아부 샴은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으며 매니저로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었고 나머지 3인의 모하메드는 모두 대학 재학 중이었다. 내전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모하메드의 부모들은 더 안전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자식들을 이 난민 대열에 합류시켰다.그리고 그 루트의 한가운데인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나는 아부샴을 만났다. 그는 희망에 가득차 있었고 미래를 낙관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독일어를 배우면 금방 이 사회에 적응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15년 10월 그들은 독일에 도착했고, 독일 내에 위치한 난민 캠프에 잠시 머물다 마를로 오게 되었다. 마를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들은 3개월에 한번씩 갱신을 해야 하는 임시 체류증으로 그들의 신분증을 대신하며 산다. 임시 체류증으로는 일을 하지 못하며,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하는 독일어 수업은 주당 10€를 내야 한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이들의 삶은 나른해 보이며, 태만해 보인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에게 허용된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A4 한 장으로 복사된 임시 체류증이 이들의 삶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네오나치들이 난민들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와 이들을 더욱 움츠리도록 만든다.
독일 정부는 현재 미성년자가 있는 난민 가족부터 독일 여권을 지급하고 있다. 아부 하마의 친 누나는 남편과 6살난 조카와 함께 마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헤르네(Herne)에서 살고 있다. 아부 하마의 조카는 독일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그의 누나와 매형은 독일 여권을 받았다. 매형은 아직 독일어가 서툴어서 직장을 못 구하고 있다. 그래서 남는 시간 근처 난민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독일정부의 난민 정책으로 그들은 2인 1조로 방 2개와 거실 하나인 아파트를 배정받아 살고 있으며, 각 300€ 남짓한 생활비를 보조받는다. 집 하나당 약 150€ 정도의 관리비와 전기세 및 상/하수도세가 나가면 다른 EU국가 보다 물가가 저렴한 독일이어도 한 달 생활비는 빠듯한 편이다.
아부샴은 이야기한다. "난 독일에서 돈을 벌어서 레바논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꺼야. 우리 엄마 옆에는 아무도 없어. 난 물담배를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물담배를 좋아해. 그래서 같이 물담배하면서 사는게 꿈이야." 이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탈출했지만 이들은 고국을 버릴 수가 없다. 막혀버린 국경은 이들의 꿈을 막아섰고 강대국의 정치 논리에 청춘을 빼앗겼으며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고향에 대한 좋은 추억조차 상실해 버렸다. 게다가 편파적이고 선정적인 대중 매체의 보도로 인해 전세계 사람들이 이들을 모두 무슬림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있지는 않는가.
아부 하마는 이야기 한다. “형과 누나들은 한달에 한번씩은 만나러 가. 뒤셀도르프와 헤르네 근처에 사는데 사실, 부모님이 걱정이야. 자식들이 사라져도 정부가 불이익을 주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곳이니까." 미국과 러시아 등의 개입으로 시리아 내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은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그 약속이 얼마나 갈 것 같아? 난 누구보다도 이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야. 시리아엔 아직 다이쉬와 알누스라가 있잖아. 난 정말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어.
전쟁이 끝나면 서둘러 시리아로 갈꺼야. 거기가 내 고향이고 내가 살 곳이야."
인터넷으로 평화로왔던 다마스쿠스의 사진을 보며 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나즈막하게 묻는다.
"그때가 언제일까? "
나는 미얀마의 폭압을 피해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들은
로힝야다. 태어난 고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존재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찍었다. 파괴와 폭력의 역장 속에서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몸뚱이는
난민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이곳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는 가시적, 비가시적, 연속적, 단발적 분쟁과 전쟁을 계속해 왔다. 그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기가 고도화되어 대량학살이 더 손쉬워졌다는 것일 뿐. 역설적으로 야만의 시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왜 인간은 다름이 아닌 틀림을 이야기하며,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이는가.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인간 본성의 문제인지 인간을 보듬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종교의
문제인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미얀마의 폭압을 피해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들은 로힝야다. 태어난 고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존재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찍었다. 파괴와 폭력의 역장 속에서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몸뚱이는 난민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이곳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는 가시적, 비가시적, 연속적, 단발적 분쟁과 전쟁을 계속해 왔다. 그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기가 고도화되어 대량학살이 더 손쉬워졌다는 것일 뿐. 역설적으로 야만의 시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왜 인간은 다름이 아닌 틀림을 이야기하며,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이는가.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인간 본성의 문제인지 인간을 보듬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종교의 문제인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신이 선택한 민족이 신의 약속을 받은 땅에 살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917년 영국
외상 벨푸어의 선언을 시작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팔레스타인과 크고 작은
물리적 충돌로 지구의 화약고가 되었다. 1993년 오슬로협정을 시작으로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협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2017년 12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고 텔아비브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그러자 전 세계가 우려를 표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력히 항의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국민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정착촌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이주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는 점령국이
비점령국에 자국민을 이주 또는 거주시켜서는 않된다는 국제적 합의(제4차 제네바 협약)을 무시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하에 이주민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분리하는 거대한 장벽을
쌓고 있으며, 정착촌 안에 정착민의 안전을 이유로 이스라엘 군대와 무장 경찰을 상주시켰다.
시오니즘(유대 민족주의) 운동에 앞장 섰던 테오도르 헤르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사람이 없는 땅,
땅 없는 민족을 위한 땅’이며 따라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엔 엄연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
높다란 분리 장벽과 유대인 정착촌 사이에 하캄(Hakam)씨와 그의 가족이 있고, 이제는 이스라엘
이주민의 정착촌에 포위되어 버린 베두인 마을 ‘칸 알 아흐마르(Khan Al Ahmar)’ 마을에는
크위스(Khwise)씨네가 살고 있지 않은가.
2018년 7월 이스라엘 의회는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민족국가로 규정한 ‘유대민족 국가법’을
만들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에 대한 원조를
삭감했으며 팔레스타인 병원 예산 지원도 중단해 버렸다. 중동의 오래된 화약고이자 '신의 약속을
받은 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듯 보인다. 점령자의 신은 다른 신을 믿는
이들에게 야박해 보인다.
신이 선택한 민족이 신의 약속을 받은 땅에 살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917년 영국 외상 벨푸어의 선언을 시작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팔레스타인과 크고 작은 물리적 충돌로 지구의 화약고가 되었다. 1993년 오슬로협정을 시작으로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협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2017년 12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고 텔아비브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그러자 전 세계가 우려를 표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력히 항의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국민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정착촌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이주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는 점령국이 비점령국에 자국민을 이주 또는 거주시켜서는 않된다는 국제적 합의(제4차 제네바 협약)을 무시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하에 이주민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분리하는 거대한 장벽을 쌓고 있으며, 정착촌 안에 정착민의 안전을 이유로 이스라엘 군대와 무장 경찰을 상주시켰다.
시오니즘(유대 민족주의) 운동에 앞장 섰던 테오도르 헤르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사람이 없는 땅, 땅 없는 민족을 위한 땅’이며 따라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엔 엄연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 높다란 분리 장벽과 유대인 정착촌 사이에 하캄(Hakam)씨와 그의 가족이 있고, 이제는 이스라엘 이주민의 정착촌에 포위되어 버린 베두인 마을 ‘칸 알 아흐마르(Khan Al Ahmar)’ 마을에는 크위스(Khwise)씨네가 살고 있지 않은가.
2018년 7월 이스라엘 의회는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민족국가로 규정한 ‘유대민족 국가법’을 만들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에 대한 원조를 삭감했으며 팔레스타인 병원 예산지원도 중단해 버렸다. 중동의 오래된 화약고이자 '신의 약속을 받은 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듯 보인다. 점령자의 신은 다른 신을 믿는 이들에게 야박해 보인다.